연상호 감독 신작, 해외 판매로 국내 개봉 전 순제작비 회수
제작 규모와 유통 전략의 결합…관객 수 너머 수익 구조에 주목
영화의 성공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숫자는 관객 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는지가 흥행의 성적표로 쓰인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실낙원’은 다른 숫자로도 눈길을 끈다. 순제작비 약 5억원, 해외 판매 118개국이다. 국내 극장 흥행에 앞서 해외 판매로 순제작비를 회수했다.
배급사 CJ ENM은 지난달 19일 ‘실낙원’의 해외 판매 수익이 순제작비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같은 달 21일 국내 개봉하기도 전에 거둔 성과다. 지난해 순제작비 약 2억원으로 완성한 ‘얼굴’에 이어 선보인 연 감독의 저예산 프로젝트가 해외 유통망과 만나면서, 국내 관객 동원에만 의존하지 않는 회수 경로를 확보했다.
AI가 재현한 아들과 현실의 아들…사랑은 변화를 어디까지 받아들이는가
‘실낙원’은 9년 전 실종 사고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 앞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가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김현주가 소영을, 배현성이 선우를 연기한다.

[사진설명=연상호 감독의 영화 ‘실낙원’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왼쪽부터), 연상호 감독, 배우 배현성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Arielaortizb/Wikimedia Commons(CC BY-SA 4.0)]
소영은 아들이 사라진 뒤 인공지능이 재현한 아들과 대화하며 빈자리를 견뎌 왔다. 그러나 실제 아들이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기억 속 모습을 간직한 AI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현실의 아들 사이에 간극이 생긴 것이다.
이 설정은 AI의 성능보다 기술이 인간관계에 들어왔을 때 생기는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과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 변화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상실을 달래기 위해 만든 존재가 오히려 현실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가족의 상실과 재회라는 익숙한 정서에 AI라는 동시대적 소재가 겹쳐지는 지점이다. 배급사 역시 가족과 모성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풀어낸 이야기가 해외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배급사의 평가지만, 작품이 기술적 소재와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연결했는지 살펴볼 단서가 된다.
영화는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으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선보였다. 제46회 하와이국제영화제에 이어 제37회 스톡홀름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다. CJ ENM에 따르면 스톡홀름에서는 현지 시간 11월 12일과 22일 유럽 프리미어로 상영될 예정이다. 해외 판권 판매와 함께 영화제를 통한 관객과의 접점도 넓혀가고 있다.
저예산의 성공, 비용 절감의 공식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례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작비의 크기만이 아니다. 작품에 맞는 제작 규모를 정하고, 이를 판매할 시장과 어떻게 연결했느냐다. ‘실낙원’은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기 전부터 해외 판매 계약이 체결됐고, 상영 이후에도 추가 판매가 이어졌다. 국내 개봉 성적을 확인한 뒤 해외 진출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작품 공개 전후로 여러 시장의 수요를 확보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는 ‘부산행’ 등을 통해 해외에 이름을 알린 연 감독의 인지도와 배급사의 판매 역량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CJ ENM은 연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외 시장의 신뢰와 독창적인 이야기, 자사의 글로벌 사업 역량이 결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사진설명=연상호 감독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Arielaortizb/Wikimedia Commons(CC BY-SA 4.0)]
관객 수가 같더라도 투입 비용과 판매 구조에 따라 사업의 결과는 달라진다. ‘실낙원’의 성과를 단순히 ‘적은 돈으로 만든 영화’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제한된 제작비로 작품을 완성하는 역량과, 그 작품을 원하는 해외 구매자에게 전달하는 역량이 함께 필요했다.
물론 순제작비 회수와 전체 사업의 최종 흑자는 구분해야 한다. CJ ENM이 당시 밝힌 것은 해외 판매 수익이 순제작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해당 발표만으로 마케팅·배급 비용 등을 포함한 전체 손익이나 국내 극장 매출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이익까지 판단할 수는 없다.
이번 성과를 모든 영화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해외 시장에서 이름을 알린 감독과 글로벌 판매망을 갖춘 배급사가 결합했다는 제작·유통 여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제작비를 낮추는 것만으로 같은 결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번 사례의 시사점은 무조건 적게 쓰는 데 있지 않다. 작품에 맞는 제작 규모를 정하고, 그에 맞는 회수 경로를 설계하는 데 있다. 저예산을 현장 인력의 보상이나 제작 여건을 줄이는 명분으로 삼기보다, 제한된 자원으로도 이야기를 완성하고 관객에게 전달할 방법을 넓히는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대규모 제작비가 필요한 영화와 작은 규모로 완성할 수 있는 영화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모든 작품이 같은 비용을 들여 같은 관객 수를 목표로 할 이유도 없다. 서로 다른 제작 방식과 유통 경로가 공존할 때 창작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실낙원’의 118개국 판매는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국내 박스오피스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제작비를 얼마나 줄였느냐가 아니라, 작품에 맞는 규모와 시장을 찾았느냐다. 그렇게 확보한 수익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질 때, 한 편의 성과는 창작을 지속할 기반이 된다.

